[SDG뉴스 특별대담] 기업 인권실사법이 바꿀 ESG “보고서 넘어 공급망 끝까지 책임져야”
국가인권위원회가 기업의 인권·환경 책임을 공급망 전반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기업 인권실사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하면서 국내 ESG 경영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일 국회에 계류 중인 두 건의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인권·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안’과 관련해 적용 범위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고, 공급망을 국제기준에 맞게 폭넓게 규정하는 한편 이해관계자의 실질적 참여와 독립적인 분쟁해결·긴급구제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SDG뉴스는 이번 인권위 결정이 국내 기업의 ESG 경영과 공급망 관리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짚기 위해 ‘이창언 우석대학교 ESG 국가정책연구소 소장’과 ‘박문수 SDG뉴스 발행인’의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박문수 발행인은 기업 인권실사가 새로운 규제의 출발점인지, 아니면 한국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새로운 경영 기준인지를 물었다. 이창언 소장은 이번 변화를 한마디로 ‘공시에서 실사로의 전환’이라고 규정했다.
박문수 발행인 = 먼저 이번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의 의미부터 짚어주시죠.
이창언 소장 = 인권위 상임위원회의 결정은 지난 5월 21일 의결됐고 공식 보도자료는 8월 20일 공개됐습니다. 두 시점 사이 약 3개월의 간격이 발생한 구체적인 이유는 공개된 자료만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권위가 국회의장에게 현재 계류 중인 두 법안의 조속한 심의와 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입니다.
이번 결정은 UN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 OECD 다국적기업 책임경영 가이드라인 등 국제적인 기업 인권규범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인권위 역시 이전부터 인권·환경 실사의 법제화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는 점에서 제도적 연속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박 발행인 = 이번 결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입니까.
이 소장 = 저는 ‘공시에서 실사로’의 전환이라고 봅니다.
공시는 기업이 무엇을 공개했느냐를 묻습니다. 반면 실사는 기업과 공급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환경 위험을 사전에 식별하고 예방하고 완화했는지, 문제가 발견됐을 때 실제로 개선했는지를 묻습니다.
ESG의 언어가 보고서 속 명사에서 현장의 동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훌륭한 정책과 목표를 적어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업이 위험을 발견했을 때 어떤 행동을 했고, 피해를 예방하거나 줄이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확인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박 발행인 = 기존 ESG에서 말하는 ‘S’, 사회적 책임과도 차이가 있습니까.
이 소장 =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ESG의 S를 사회공헌이나 기부, 임직원 복지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기업이 존중해야 할 인권의 범위에는 강제노동과 아동노동, 노동권, 산업안전, 공급망 노동자의 권리 등이 포함됩니다.
환경 역시 단순히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토지와 자원 이용, 에너지, 순환경제, 오염 예방 등이 함께 다뤄져야 합니다.
결국 공급망 현장에서는 E와 S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책임체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박 발행인 = 인권위가 법 적용 대상을 현재보다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눈에 띕니다.
이 소장 = 현재 발의된 법안 가운데 정태호 의원안은 상시근로자 500명 이상 또는 전년도 매출액 2000억 원 이상, 박홍배 의원안은 1000명 이상 또는 매출액 5000억 원 이상 기업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권위는 기업들이 이미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 등을 통해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운영해온 경험 등을 고려하면 현재 적용 범위를 과도한 부담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박 발행인 = 한국 기업에 인권·환경 실사법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 소장 = 한국 산업구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제조업과 수출 의존도가 높고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핵심 산업이 글로벌 원료·부품 공급망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해외 공급망에서 강제노동이나 심각한 환경침해가 발생했다고 해도 그것이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로 끝나는 시대가 아닙니다.
한국 기업의 수출과 투자, 기업 평판은 물론 법적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권실사를 단순히 규제가 하나 더 생긴다고 볼 것이 아니라 공급망의 취약성을 사전에 발견하고 관리하는 ‘위험관리이자 기업 경쟁력의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박 발행인 = 반대로 유럽에서는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국이 국제 흐름과 반대로 가는 것 아닙니까.
이 소장 = 그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닙니다.
EU가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인 CSDDD의 적용범위 등을 조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업과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환경 위험을 식별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실사의 기본 원칙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닙니다.
인권위 역시 이러한 점을 명확히 짚고 있습니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유럽의 기업 규모 기준이나 숫자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산업구조와 공급망 특성에 맞는 실사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 발행인 = 법의 직접 적용 대상이 대기업 위주라면 중소기업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이 소장 =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접 영향이 상당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 공급망 전반의 위험을 실사하게 되면 원료 공급기업, 부품업체, 물류기업, 외주업체 등 직접적인 법 적용 대상이 아닌 중소·중견기업도 정보 제공이나 개선 요구를 받게 됩니다.
저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공급망은 상품이 이동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책임이 이동하는 길입니다.
박 발행인 = 그렇다면 결국 대기업의 ESG 책임이 중소기업에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이 소장 = 바로 그것이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입니다.
대기업이 협력사에 수십 장짜리 ESG 설문지를 보내고 확인서와 각종 자료만 요구한 뒤 ‘실사를 마쳤다’고 한다면 실질적인 인권실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책임의 외주화’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협력업체를 동일한 강도로 조사하는 방식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강제노동, 중대재해, 심각한 환경오염 등 피해의 심각성과 발생 가능성이 높은 분야부터 집중적으로 점검하는 위험 기반 접근이 필요합니다.
실사는 서류를 늘리는 작업이 아니라 위험을 줄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박 발행인 =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까.
이 소장 = 그렇습니다.
기업이 스스로 위험을 평가한 뒤 스스로 ‘문제없다’고 결론 내리는 구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공급망 노동자나 피해자는 기업에 비해 정보와 자원이 부족하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보복이나 불이익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여란 회의실에 의자를 하나 더 놓는 일이 아니라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실제로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박 발행인 = 결국 피해구제 시스템도 상당히 중요하겠습니다.
이 소장 = 실사는 구제로 이어져야 합니다.
위험을 조사하고 보고서에 기록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실사의 의미가 없습니다.
위험을 예방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시정과 피해구제가 실제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심각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임박했을 경우 긴급한 구제 조치를 내릴 수 있는 제도도 필요합니다.
기업 인권에서 구제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제도가 실제 효과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입니다.
박 발행인 = 기업들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합니까.
이 소장 = 첫째는 공급망 지도를 만드는 일입니다.
어떤 국가와 사업장, 어떤 원료와 공정에 위험이 집중돼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둘째는 책임체계를 갖추는 것입니다. 인권실사를 ESG팀 하나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사회와 구매·조달, 인사·노무, 안전·환경, 준법부서가 함께 움직이는 경영시스템이 돼야 합니다.
셋째는 고충처리와 피해구제체계입니다.
익명 신고가 가능해야 하고 보복을 막아야 하며, 독립적인 조사와 시정, 피해자 보호 절차도 마련해야 합니다.
핵심은 ‘인권실사를 또 하나의 보고서로 만들지 말고 경영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박 발행인 = 정부가 해야 할 일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이 소장 =그렇습니다.
총괄부처와 관계기관의 협의·조정 체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실제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면 업종별 위험지도와 표준 가이드라인, 공통 데이터 양식도 필요합니다.
특히 중소기업을 위한 교육과 컨설팅 지원이 중요합니다.
여러 대기업이 같은 협력업체에 서로 다른 ESG 자료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일이 생기면 중소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공통 기준을 마련해 불필요한 행정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박 발행인 = 기업의 위반에 대한 제재는 어느 정도가 적절하다고 봅니까.
이 소장 = 처벌이 무조건 강하다고 좋은 제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어떤 행위를 하면 어떤 책임이 발생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실제 위반이 발생했을 때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효과적이고 비례적이며 억제력 있는 제재’가 필요합니다.
금전적 제재나 공공조달 참여 제한 등 행정·재정적 수단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박 발행인 = 이번 문제를 SDGs 관점에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소장 =기업 인권실사는 여러 SDGs가 기업의 공급망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강제노동과 아동노동 근절을 다루는 SDG 8.7, 노동권 보호와 안전한 노동환경을 강조하는 SDG 8.8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기업의 지속가능한 관행을 요구하는 SDG 12.6, 법치와 사법 접근성을 다루는 SDG 16.3,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제도를 강조하는 SDG 16.6, 포용적인 의사결정의 SDG 16.7도 관련이 있습니다.
공급망 문제는 기업 혼자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SDG 17 파트너십’도 중요합니다.
지속가능발전이 선언에서 실제 제도로 넘어가려면 SDGs가 기업의 조달과 노동, 투자, 고충처리와 피해구제 과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박 발행인 = 마지막으로 이번 인권위 결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주시죠.
이 소장 = “공시에서 실사로, 실사에서 예방과 개선으로, 다시 구제와 책임으로 가는 전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어서야 실사가 시작됩니다.
책임이 공급망의 가장 먼 현장까지 닿을 때 ESG와 SDGs는 비로소 선언을 넘어 제도가 됩니다.
이번 대담에서 이창언 소장은 기업 인권실사를 단순한 규제 강화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ESG의 무게중심이 공시와 평가에서 위험의 예방·개선·구제라는 실제 책임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법의 직접 적용 대상이 아닌 중소·중견기업도 대기업의 공급망 관리 과정에서 사실상 인권·환경 실사의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제도의 성패는 대기업의 책임을 협력기업에 단순히 전가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데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기업 인권실사 시대의 평가는 기업이 무엇을 선언하고 얼마나 화려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했는지가 아니라, 위험을 발견했을 때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에 달려 있다.
ESG가 보고서를 넘어 경영으로, SDGs가 선언을 넘어 제도로 이동하는 지점이다. 기업의 책임 역시 본사를 넘어 공급망 가장 먼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지역사회, 환경에까지 닿아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이 한국 기업을 향하고 있다.
대담 = 박문수 SDG뉴스 발행인
https://www.sdg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0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