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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알혼섬 기행] 불칸 바위(Burkhan Rock)에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다(김운우)

person ESG국가정책연구소 calendar_today 2026.10.12 01:47 visibility 조회 45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기에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 어쩌면 여행이란 단순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 바이칼 알혼섬 여행이 그랬다. 출발부터 계획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이상하게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고, 꼭 가야 할 곳에는 도착했다. 그리고 떠날 때 가지고 갔던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얻어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를 얻었다기보다 오랫동안 마음에 짊어지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왔다.

시작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새벽 5시 40분,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함께 가기로 한 교수님은 6시 10분쯤 도착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왔다. “차를 놓쳤습니다. 7시 10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참에 나는 먼저 출국 수속을 마치고 된장찌개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웠다. 아무리 신령한 바이칼을 찾아가는 길이라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른 아침 뜨끈한 된장찌개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속도 편안해지고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겼다.

7시 30분경 베이징행 비행기 게이트에서 교수님과 겨우 만났다. 베이징에 도착해서는 환승 시간이 촉박해 터미널을 옮겨 거의 뛰다시피 했다. 출발 10분 전쯤에야 간신히 게이트에 도착했고, 다시 세 시간을 날아 러시아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한숨 돌리나 싶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아뿔싸, 노트!” 여행 일정과 중요한 메모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노트를 비행기 좌석에 두고 내린 것이다. 버스가 떠나기 직전 다시 뛰어가 승무원에게 좌석 위치를 설명했다. 천만다행으로 노트는 그대로 있었다. 노트를 품에 안는 순간, 물건 하나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여행 전체를 되찾은 것처럼 반가웠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이번에는 입국심사에서 공항 관계자가 나를 따로 불렀다.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긴 채 별도의 공간에서 여러 질문을 받아야 했다. 왜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왔는가, 러시아에서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하러 왔는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나는 그저 바위 하나 보러 왔는데 일이 점점 커지는구나.’ 약 30분 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뜻하지 않은 ‘특별 환영식’을 치른 셈이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해 간 e-SIM은 연결되지 않았고 차량 호출 앱도 사용할 수 없었다. 야심 차게 챙겨온 동시통역기마저 정작 필요할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첨단기술이 하나씩 무력화되자 마지막까지 남은 소통수단은 단 두 가지였다. 바로 ‘바디랭귀지와 눈치’였다. 특히 다년간 해외여행으로 단련된 동행 교수님의 눈치는 웬만한 인공지능 번역기보다 뛰어났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버처럼 운영되는 현지 차량을 잡아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 숙소라 정확한 출입구를 찾지 못해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그때 같은 건물 카페에서 일하던 직원이 다가왔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의 친절한 도움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숙소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번 여행이 내게 전하려던 첫 번째 메시지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믿었던 기계가 멈춘 자리에서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나타났다. AI가 아무리 발전하고 번역기와 스마트폰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길을 잃은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내미는 존재는 결국 또 다른 사람이다. 바이칼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번 여행의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배우고 있었다.

개천절, 하늘이 열린 날 바이칼에 서다

다음 날, 미니버스를 타고 약 6시간 30분을 달려 알혼섬에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승차장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가 근처 약국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고서야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매표소를 찾아냈다. 키릴문자로 적힌 러시아어가 우리 눈에는 마치 암호처럼 보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표를 사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이 앞다퉈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예상하지 못한 새치기 경쟁까지 경험했다. 질서와 제도를 연구하는 두 교수가 러시아 한복판에서 뜻밖의 ‘현장체험연구’를 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리고 배를 타고 바이칼을 건넜다. 다시 거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린 끝에 마침내 알혼섬 후지르(Khuzhir)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은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불칸바위로 향하면서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개천절은 말 그대로 ‘하늘이 열린 날’이다. 동시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뜻을 되새기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나는 ‘지구의 눈’이라 불리는 바이칼의 한가운데, 오랜 세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온 알혼섬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참 묘한 인연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바이칼은 호수라기보다 바다에 가까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물은 멀리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 거대한 자연 앞에 서니 평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작아졌다. 직책도, 명함도, 성취도, 걱정도 잠시 의미를 잃었다. 그저 거대한 자연 앞에 선 한 사람의 인간만 남았다.

그곳에 13개의 세르게(Serge)가 서 있었다. 본래 말을 매어두던 기둥에서 유래한 세르게는 이 지역의 전통 신앙에서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 여러 전설과 해석이 있지만, 내 눈에는 무엇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둥처럼 보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소중히 여기며, 사람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ESG와 지속가능발전의 가장 오래된 모습이 아닐까.’

바이칼에서 만난 ESG와 지속가능발전

우리는 ESG를 이야기할 때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용어부터 떠올린다.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역시 17개의 목표와 수많은 세부 지표로 설명한다. 그러나 불칸바위 앞에서는 그렇게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힘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독점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함께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 그리고 우리가 누린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물려주는 것. 결국 지속가능성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늘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환경과 자연을 지키는 것이 E이고, 사람과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S이며, 서로 존중하고 함께 결정하며 책임지는 것이 G라면, 세르게가 상징하는 하늘·땅·사람의 연결은 ESG의 정신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수천 년 전 이곳의 사람들은 ESG라는 단어도, SDGs라는 개념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며,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의 행복도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삶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새롭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속가능성의 철학을 어쩌면 바이칼의 오래된 바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3개의 세르게 앞에서 기원을 올렸다. 이곳은 오랜 세월 신성한 존재들과 연결되는 장소로 여겨져 왔고, 칸 바바이(Khan Babai)를 비롯한 신성한 존재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13개의 세르게를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설 속 13명의 신이 다시 나타나 세상을 구해주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전쟁을 멈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 굶주린 이웃에게 밥 한 끼를 건네는 사람, 아이를 지키는 사람, 외로운 노인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 갈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의 길을 찾는 사람, 숲과 강을 지키는 사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생명 하나를 살리고 공동체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대를 지키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신이 나타나 세상을 바꾸어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우리 스스로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되어주는 것.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개천절의 홍익인간 정신으로 이어졌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수천 년 전의 말인데도 바이칼에서는 조금도 낡은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후위기와 전쟁, 양극화와 기술격변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인류에게 더 절실한 말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제법 거창한 생각을 하며 우리는 부랴트족의 전통에 따라 경건한 마음으로 세르게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여섯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한 현지인이 다가와 손짓하며 알려주었다.

“반대입니다. 시계 방향으로 도세요.”

교수님과 나는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우리가 지금까지 거꾸로 돌았네?’ 세계평화를 기원하겠다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두 사람이 정작 신에게 경배하는 방향부터 틀린 것이다.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바이칼을 지키는 신들의 마음이 이 거대한 호수만큼 넓다면 이 정도 실수쯤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우리는 방향을 바꿔 다시 세 바퀴를 돌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것도 인생과 닮아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방향을 잘못 잡는다. 중요한 것은 한 번도 길을 잘못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시 돌아설 수 있는 용기인지 모른다. 조금 거꾸로 걸었다고 인생 전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방향을 깨달은 순간 다시 걸으면 된다.

그때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 신기한 동행자가 나타났다. 멋진 개 한 마리가 우리 앞을 걷기 시작했다. 앞서가다가 우리가 늦어지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우리가 가까이 가면 다시 걸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이번에는 제대로 따라오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웃으며 그 자리에서 이름을 하나 붙였다. 영견(靈犬). 조금 전에는 신에게 가는 길을 거꾸로 돌더니 이제는 개에게 길 안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정겹고 평화로웠다. 우리는 영견을 따라 바이칼 호숫가로 내려갔고, 마침내 불칸바위 앞에 섰다. 

불칸바위에 손을 얹었다. 막상 그 앞에 서니 무엇을 빌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그런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나 자신의 소원이 아니었다. 세계평화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미워하기보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도 빌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야 나 자신의 작은 소원 하나를 조심스럽게 보탰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삶은 결국 ‘나’라는 한 사람의 크기에 머문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기 시작하면 삶의 크기는 달라진다. 나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지역과 나라로, 그리고 마침내 세계로 넓어진다.

나의 행복만을 바라는 삶에서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함께 바라는 삶으로 넓어지는 것. 그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고, 지속가능발전의 출발이며, 어쩌면 평화를 향한 가장 작은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국경은 어른들이 만들지만 아이의 웃음에는 국경이 없다

숙소로 돌아와 오물(Omul, омуль)이라는 바이칼에서 잡힌 물고기로 만든 국과 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그때 반찬을 나르던 주인집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부랴트계로 보이는 아이였다. 어른들 사이를 오가며 낯선 한국 사람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에서 문득 오래전 우리나라 1970년대 시골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겨운 마음에 내가 웃으니 아이도 웃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 한 문장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국경은 어른들이 만들지만, 아이들의 웃음에는 국경이 없다.

세계평화라는 것도 거창한 국제회의장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낯선 나라의 아이를 보며 내 아이를 떠올리는 마음, 다른 나라 사람의 아픔을 보며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지 않는 마음, 서로 다른 얼굴 속에서 나와 같은 인간을 발견하는 마음에서 평화는 시작된다.

상대를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계가 생기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바라보는 순간 그 경계는 조금씩 낮아진다. 어쩌면 세계평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나의 삶처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공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사진 김찬우 (한국ESG학회 부회장·우석대 ESG국가정책연구소 연구원·금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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