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안전, 핵심 리스크로 확장…위험성평가·공시 등 강화
2022년 1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산업재해 예방은 기업 경영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중대산업재해 발생 시 경영책임자 등에 대한 형사책임을 묻는 제도가 도입되자 기업들은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안전예산 확대, 외부 컨설팅 및 내부점검 강화에 나섰다. 그러나 법 시행 이후에도 산업재해 감소 추세는 뚜렷하지 않으며, 소규모 사업장의 사고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정부의 산업안전 정책도 처벌 중심에서 ‘사전 예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사고 발생 후 책임을 묻는 것과 별개로 사업장이 스스로 현장의 위험을 찾아 제거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2025년 9월 노동안전 종합대책을 통해 사업장 스스로 위험요인을 발굴하고 개선하는 자율예방체계 강화를 제시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다.
이러한 접근은 1972년 영국 로벤스 보고서가 제시한 산업안전보건 규율의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 국가가 모든 위험에 대한 세부 규칙을 만들고, 사업주가 이를 형식적으로 준수하도록 하는 방식만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산업현장의 위험을 충분히 통제하기 어렵다. 사업주와 노동자가 사업장별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자율규율’이 현대 산업안전 체계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최근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이러한 방향을 분명히 한다. 개정법은 위험성 평가의 실효성을 높이고, 안전보건 현황 공시제도를 도입하면서, 기업의 안전보건 활동을 기업의 경영책임과 대외적 설명책임의 영역으로 확대했다. 위험성 평가 관련 개정은 올해 6월 1일부터, 안전보건 현황 공시제도는 지난 8월부터 시행됐다.
사업주 법정 의무 구체화…위험성 평가·개선 조치 등 실시해야
위험성 평가란 사업주가 설비·원재료·작업방법·작업행동 등에서 유해·위험 요인을 찾아내고, 그 위험 수준을 평가한 뒤 이를 줄이기 위한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절차다. 제도의 핵심은 평가표 작성 자체가 아니라 실제 작업과정에서 노동자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근로환경을 찾아 이를 제거하거나 최소화하는 데 있다.
개정법은 위험성 평가를 사업주의 법정 의무로 더욱 구체화했다. 사업주는 위험성 평가와 개선조치를 실시해야 하며, 근로자와 근로자대표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평가 결과와 주요 사항은 교육, 설명회, 게시, 서면 또는 전자적 방법으로 근로자에게 알려야 하고 관련 기록도 보존해야 한다.
위험성 평가를 단순히 실시하는 것뿐 아니라 노동자의 참여와 결과 공유, 기록·보존까지 일련의 관리 절차로 규율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지 않으면 1000만 원 이하, 근로자 또는 근로자대표의 참여 보장 및 결과 공유 의무를 위반하면 500만 원 이하, 기록·보존 의무를 위반하면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안전보건 현황 공시제도 역시 중요한 변화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주와 공공기관 등은 안전보건관리체계, 산업재해 발생 현황, 전년도 활동실적과 당해연도 활동계획, 안전보건 투자 및 재발방지 대책 등을 매년 공시해야 한다. 이는 안전보건을 기업 내부의 관리사항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노동자·투자자·고객·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경영정보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구조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기본 원리와 매우 유사하다.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용자가 스스로 자율적 예방체계를 구축해 산업재해를 예방하도록 한다. ESG 역시 기업이 환경·사회 영역의 부정적 요인을 스스로 파악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영역은 자율적인 위험 관리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절차적으로도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가 위험성 평가를 통해 유해·위험 요인을 식별하고 개선하도록 하고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요구한다. ESG 역시 기업이 환경·사회·지배구조와 관련된 위험을 식별하고 예방·완화 조치를 실시한 후, 그 과정과 성과를 이해관계자에게 공개하는 구조다.
산업재해는 대표적인 노동·인권 리스크다. 이에 따라 기업의 안전보건은 더 이상 안전관리 부서만의 업무에 머물기 어렵게 됐다. 이사회와 경영진은 물론 인사·구매·생산 부서가 함께 관리해야 할 기업의 법률적 의무이며, ESG 의제로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이사회부터 공급망까지…기업 ‘안전 거버넌스’ 시험대
기업 입장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계기로 산업안전을 포함한 전사적인 ESG 관리 체계를 점검할 필요성이 커졌다. 우선 산업재해 위험은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발생하지 않는다. 도급·용역·위탁관계의 협력업체 노동자, 특수형태근로 종사자, 플랫폼 종사자, 이주노동자 역시 위험한 작업에 노출될 수 있다.
특히 원청 또는 발주기업의 단가와 납기, 작업량, 인력운영 방식은 협력업체의 안전보건 여건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자사 근로자만을 보호대상으로 하고, 사업장을 중심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이 협력회사를 포함한 종사자의 안전까지 기업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는 기업의 법률적 의무로 작용한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경영진과 이사회 차원의 안전보건 거버넌스가 마련되고,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경영책임자는 위험성 평가 결과와 중대위험 작업, 사고 현황, 개선조치 이행률, 안전보건 예산을 정기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해졌다.
고위험 작업이 확인될 경우 설비 개선이나 작업중지, 인력충원, 공정변경과 같은 실질적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지도 중요하다. 위험성 평가도 연례행사나 사내 이벤트가 아니라 상시적인 경영관리 절차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신규 설비를 도입하거나 공정·작업 방법을 변경하는 경우, 사고나 아차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는 수시평가를 실시하고 개선조치별 책임자와 이행 기한, 이행 여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결국 평가서의 작성 자체보다 발견된 위험이 실제로 제거되거나 감소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과 관리체계가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참여 역시 중요한 요소다. 작업자 면담, 현장순회, 작업 전 안전회의, 익명 제보 채널, 아차사고 보고제도 등을 통해 현장의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개선조치로 연결하는 체계를 갖추는 방식이다. 현장의 위험은 실제 작업자가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노동자의 참여가 위험성 평가의 실효성을 좌우할 수 있다. 위험을 제기한 노동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부 절차도 함께 요구된다.
협력업체와 공급망을 포함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도 과제로 떠오른다. 협력업체 선정과 계약 단계에서 안전보건 역량과 재해 이력, 고위험 작업 관리방안을 점검하고, 계약 이후에도 공동점검과 개선 지원을 실시하는 방식이다. 원청기업이 협력업체에 안전수칙 준수만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작업에 필요한 비용과 인력, 공사기간이 계약조건에 적절히 반영됐는지까지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전보건 현황 공시는 지속가능성(ESG) 공시 및 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연계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재해 건수만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보건관리체계, 위험성 평가 및 개선조치, 안전보건 투자, 협력업체 관리, 노동자 참여, 재발방지 조치 등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방향이다. 외부에 공개된 공시 내용과 실제 현장의 기록이 일치하도록 관리하는 것도 기업의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다.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를 기업이 스스로 발견하고 예방해야 할 노동인권 리스크로 다루는 방향을 강화하고 있다. 위험성 평가와 노동자 참여, 개선조치, 공시는 각각 분리된 절차라기보다 하나의 예방체계로 연결된다. 기업이 이를 충실히 운영할 때 산업재해 예방은 법 준수를 넘어 신뢰받는 ESG 경영의 기반이 될 수 있다.